
정의와 폭력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
영화 시카리오는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을 소재로 한 범죄 스릴러이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총격전이나 액션이 아니다. 이 영화는 ‘정의가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세계’를 냉정하게 관찰한다. 법과 제도, 도덕과 윤리가 유지될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결국 무엇을 파괴하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시카리오는 관객을 안심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불편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며, 끝까지 판단을 유보한다. 이 영화가 남기는 긴 여운은 바로 그 침묵에서 나온다.
정의를 믿는 시선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시카리오의 이야기는 FBI 요원 케이트 메이서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케이트는 현장 경험이 풍부한 요원이지만, 동시에 법과 원칙을 신뢰하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범죄와의 싸움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사회 질서를 지키기 위한 과정이다. 영화 초반, 애리조나에서 진행되는 마약 조직 은신처 급습 장면은 케이트라는 인물이 서 있는 출발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현장에서 발견되는 것은 단순한 범죄의 흔적이 아니다. 벽 안에 숨겨진 수십 구의 시체는, 이 전쟁이 이미 인간의 상식을 넘어선 영역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케이트는 충격을 받지만, 동시에 더욱 강한 사명감을 느낀다. 그녀는 이 폭력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법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영화 전반부에서 그녀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다.
케이트는 자신의 임무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체포, 수사, 기소라는 절차 속에서 범죄를 단죄하는 것. 그녀에게 정의란 감정이 아니라 구조이며, 개인의 판단보다 시스템이 우선해야 하는 가치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CIA와의 합동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도, 이 작전이 결국 더 큰 정의를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시카리오는 아주 미묘한 균열을 만든다. 케이트는 작전에 참여하지만, 작전의 목적과 범위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한다. 명령은 내려오지만 이유는 공유되지 않는다. 그녀는 질문을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애매한 답변이나 회피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트는 작전을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전히 시스템을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순수함이 아니라, 구조에 대한 신뢰다. 케이트는 개인의 판단보다 조직의 판단이 옳을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은 그 일부로서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고 여긴다. 시카리오는 이 태도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인 선택으로 묘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한다. 시스템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시스템 자체를 의심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유지한다.
하지만 영화는 곧 이 믿음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케이트가 참여하게 되는 작전은 점점 그녀가 알고 있던 ‘합법적 수사’의 영역에서 벗어난다. 국경을 넘는 순간, 그녀가 믿어온 법은 더 이상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케이트는 이 변화를 즉각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세계관은 여전히 옳고 그름의 구분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시카리오가 보여주는 것은, 정의를 믿는 개인이 얼마나 쉽게 이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케이트는 악의적인 인물이 아니며, 무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성실하고 유능하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이 시스템에 적합한 인물이다. 질문은 하지만, 결국 따르는 사람. 의심은 하지만, 끝내 거부하지 않는 사람. 시카리오는 케이트를 통해, 정의를 믿는다는 것이 항상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조용히 드러낸다.
이 단계에서 관객은 케이트와 동일한 위치에 서 있다. 아직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며, 아직 이 전쟁이 완전히 타락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시카리오는 이 상태를 길게 유지함으로써, 이후 다가올 붕괴를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정의를 믿는 시선에서 출발했기에, 그 정의가 무너질 때의 충격은 훨씬 크다.
법이 사라진 국경에서 작동하는 새로운 질서
시카리오에서 국경은 단순한 지리적 경계가 아니다. 그것은 법과 도덕, 질서가 효력을 잃는 지점이며, 동시에 새로운 규칙이 작동하는 공간이다. 케이트가 멕시코 국경을 넘는 순간, 그녀가 알고 있던 세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이 영화는 국경을 넘는 장면을 통해 ‘법이 적용되지 않는 현실’을 매우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내부에서 케이트는 법 집행관이다. 그러나 국경을 넘자마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작전은 더 이상 공개적으로 설명되지 않고, 목적 또한 흐릿해진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효율과 결과다. 누가 법을 어겼는지보다, 누가 제거되어야 하는지가 중요해진다.
국경을 넘는 장면의 긴장감은 폭력 그 자체보다, 언제든 폭력이 터질 수 있는 불안정한 침묵에서 나온다. 차량 행렬과 주변의 시선, 그리고 설명 없는 명령들은 법이라는 안전장치가 사라진 공간의 공포를 그대로 전달한다.
CIA 요원 맷은 이 새로운 질서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냉소적이며 윤리적 고민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기준은 단순하다. 결과가 필요하고, 그 결과를 위해 무엇이 희생되든 상관없다. 그는 이미 이 전쟁에서 ‘옳은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 질서 속에서 케이트는 점점 주변 인물이 된다. 그녀는 현장에 있지만 결정권은 없다. 질문을 던지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의 존재는 작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분에 가깝다. 법 집행 기관 소속 인물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폭력을 합법의 영역에 두는 장치가 된다.
시카리오는 시스템이 정의를 위해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정의를 명분으로 개인을 소모한다. 케이트는 이 폭력의 일부가 되지만, 그 폭력을 멈출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지는 않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시스템 속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그대로 반영한다.
알레한드로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폭력의 완성형
알레한드로는 시카리오에서 가장 복합적이며 동시에 가장 무서운 인물이다. 그는 과묵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항상 상황을 관조하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이 전쟁의 핵심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알레한드로는 법의 편도, 범죄자의 편도 아니다. 그는 복수를 위해 움직이는 개인이며, 그 목적이 시스템의 이해관계와 일시적으로 일치할 뿐이다. 그는 명령을 따르지만, 동시에 시스템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
그의 폭력은 감정적 분노가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행위다. 그는 설명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는다. 시카리오는 이 폭력을 미화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회피하지도 않는다. 카메라는 담담하게 그의 행동을 따라가며 관객에게 판단을 맡긴다.
알레한드로의 과거가 드러나는 순간, 관객은 그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이해와 정당화를 명확히 구분한다. 그의 복수는 개인적으로는 설득력을 가지지만, 그 방식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다. 이 폭력의 순환은 끝나지 않는다.
케이트와 알레한드로의 대비는 영화의 핵심이다. 케이트는 정의를 믿고, 알레한드로는 정의를 포기했다. 케이트는 질문을 던지고, 알레한드로는 행동한다. 이 차이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서로 다른 방식이다.
시카리오가 끝내 답하지 않는 질문
시카리오의 마지막은 해결이 아니라 공백이다. 영화는 갈등을 봉합하지 않고, 정의의 승리를 선언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질문을 관객에게 남긴다. 케이트는 진실을 알지만, 그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다. 아니, 드러낼 수 없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침묵이다. 이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체념이며 동시에 생존이다. 시카리오는 이 선택을 비겁하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는 정의를 선택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울려 퍼지는 총성은 폭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상징한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이 무감각한 현실 인식이 바로 시카리오의 가장 큰 공포다.
결국 시카리오는 묻는다. 법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선택은 과연 우리를 구원하는가.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그 질문을 남긴 채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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